[ 아시아경제 ] 기축통화이자 안전자산의 대명사였던 달러의 가치가 3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과 물가 둔화, 감세안 및 지출 확대에 따른 재정건전성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미·중 무역 합의 불확실성까지 맞물리며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아메리카' 흐름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란 전망마저 나온다.
12일(현지시간) CNBC에 따르면 유로와 파운드 등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장중 한때 97.6까지 미끄러지며 3년3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보였다. 달러지수는 지난해 말 대비 10%나 떨어졌으며, 올해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달러 약세 흐름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같은 날 신흥국을 포함한 10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블룸버그 달러지수(BBDXY)도 장중 0.8% 하락하며 2022년 4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약세인 달러 하락세를 더욱 부추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1~2주 이내에 모든 무역 상대국에 거래 조건을 명시한 서한을 발송할 것"이라며 내달 9일 종료되는 상호 관세 유예 기간 이후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율의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딜을 수용하든지, 떠나든지 양자택일하라"라는 그의 강경한 입장에 시장은 즉각 달러 매도로 반응했다.
여기에 5월 소비자물가(CPI)에 이어 생산자물가(PPI)까지 시장 예상보다 둔화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달러 하방 압력을 더했다. 트럼프 관세 폭격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 조짐이 포착되지 않자 연방준비제도(Fed)가 추가로 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전망도 반영됐다. 금리가 인하되면 투자자 입장에선 미국 국채 등 달러 자산의 이자 수익률이 낮아지게 된다. 이는 자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다른 통화나 국가로 이동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미국 자산 수요 감소가 달러 수요 감소로 이어지며 달러 가치는 하락 압력을 받게 된다.
모넥스의 헬렌 기븐 외환 트레이더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 재개는 미국 경제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으며, 이는 Fed의 완화적 통화정책에 대한 기대를 자극한다"며 "달러지수는 올해 5~6% 추가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최근 미국 국채 금리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달러 가치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금리 상승은 달러 강세로 이어지지만, 올해 4월부터는 이 같은 상관관계가 무너지며 '금리 오름세 속 달러 약세'라는 이례적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 배경에는 미국 재정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인 감세 법안이 실제 시행되면 향후 10년간 미국 정부 부채가 3조1000억달러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5월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에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는데,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결정이었다.
달러 약세 흐름이 뚜렷해지자 해외 투자자들은 미국 주식과 채권을 매도하고, 자금을 자국 또는 다른 지역 자산으로 분산하고 있다. 영국 자산운용사 M&G 인베스트먼츠의 파비아나 페데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기관투자가들이 미국 자산에 과도하게 집중된 포트폴리오를 점검하며 지역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엔·파운드·유로 등 주요국 통화는 달러 대비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날 외환시장에서 달러는 엔화 대비(1달러) 143.10엔대까지 떨어지며 엔고·약달러 현상이 심화됐다. 유로는 2021년 10월 이후 약 3년8개월 만에 달러 대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영국 파운드는 3년 만에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영국 가디언은 "외환 트레이더들이 달러를 팔고 엔화와 유로화를 매수하는 가운데, 이들 통화는 달러 대비 약 1% 상승했다. 같은 날 FTSE100지수는 사상 최고치(8884포인트)를 경신했다"며 "투자자들이 미국 주식보다 다른 지역 자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해외 자금의 '달러 이탈'이 일시적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헤지펀드 AQR 캐피털매니지먼트의 클리프 아스네스 창립자는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자리를 어느 통화가 대신할지 자문해봐야 한다"며 "유럽이나 중국의 경제·재정 상황도 불안정한 만큼, 미국에서 대규모 자금 이탈이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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